사람이 사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은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 시간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조급해하기도 때로는 여유롭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시간 속에서 내일을 맞이합니다.
꿈도, 희망도, 비관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간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내일 속의 우리는 더욱더 나은 환경과 나은 모습이 되고자 합니다.
어떠한 환경? 어떠한 모습?
바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이상, 그리고 그 이상이 현실이 된 환경과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단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곧 희망이고 꿈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비관자들이죠. 흔히 이야기해서 비관론자라고 분류할 수 조차 없는 맹목적인 비관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하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에게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꿈 그리고 내일과 바로 1시간 후에 대한 계획등에 대해 비관적인 의견을 맹목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맥하던 심증적이던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거와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와 사실을 절대적으로 맹신한다는 착각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그러한 맹신하는 것 자체를 스스로가 극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다보니, 열심히 증거와 사실을 나열하는데만 촛점을 맞추게 되고, 그러한 증거 나열과 사실은 곧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더욱더 어려운 과정을 스스로가 회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회피과정을 통해 비관적인 사고와 느낌을 쏟아내는 사람은 누군가를 설득시킬 힘도, 의지도 없는 것과 더불어서 스스로를 설득시킬 힘도, 의지도 상실하게 됩니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그 비관과 비난 자체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써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단순하게 비관과 비난을 내 뿜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안"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관과 비난적 사고가 어릴적 부터 고착화가 되어있던, 어떠한 계기가 있어서 고착화 되었던, 고착화된 일종의 "비관적 사고 기전(Mechanism)"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은 쏟아낼 수 있어도, 그 대안적인 발전적 미래는 쏟아내기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한번 다 내려 놓고 생각을 해보죠.
어떠한 작은 증거와 사실은 우리가 "확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익히 알았듯이,
그냥 "개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고리"일 뿐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관심"이라는 안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 이라는 안테나가 받아들이는 수많은 신호 중 특히, 비관적 사고의 증거와 사실들에 더욱더 촛점을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비관적 사고의 증거와 사실에 맞게, 비관적 의견, 비관적 판단, 맹신 등... 수많은 것들을 더욱더 고착화 시키고 더욱더 확대 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비관론자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관론과 대조되는 비관론은 무조건 멸시해도 무조건 맹신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비관론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증거와 사실을 나열하는데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파괴론자와 비관론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안의 제시 여부입니다.
대안을 내기 위해서는 대안의 기조가 형성되어야 하고, 대안의 기조로써 결론을 희망이라는 결과로 이끈다면 분명 파괴론자와 비관론자는 구별이 될 수 있습니다.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는 상호보완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낙관론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비관론자가 존재해야 낙관적인 미래, 희망적인 미래, 밝은 미래를 더욱더 안정적으로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고, 비관론자 곁에 낙관론자를 가장 가까이 둔다면 그 비관론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파괴론자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파괴론자는 결국 현실속에서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 누구나 함께 하는 인생속에서 파괴만 남는 결과를 결국 받아들일 사람은 누가 있고, 스스로도 매일 매일 내일을 맞아하는 가운데 과연 진정한 파괴를 즐기는 파괴론자라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과 극도의 시기와 질투가 만들어내는 파괴론적인 사고방식은 결국 낙관론자이던 비관론자이던 모두에게서 배척되고 결국 스스로 외로운 결과를 맞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파괴론자들은 그저 어떠한 일이나, 어떠한 사건, 어떠한 움직임이나 행동, 의도를 저지하였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숨은 의도를 가지고 앞서 이야기한 저지에 대한 성공을 희열로 그리고 숨은 의도에 대한 실천으로 기쁨을 맞이하곤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괴론자들은 남을 잘 믿지도, 남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 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기에 정황파악에 극도로 약한 것이 파괴론자들의 특성입니다.
과연 여러분들 곁에는 혹은 여러분 스스로가 파괴론적인 사고 방식으로 함부로 비관론을 제시한다고 행세하지는 않나요? 누군가를 막기에는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미래보다는 행복한 미래가 결론적으로 그 상대방에게 더욱더 이로울 수도 있습니다.
낙관론도 비관론도 모두 공존하는 현실속에서 결론은 바로 "긍정" 그리고 "희망", "행복" 입니다.
죽은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 시간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조급해하기도 때로는 여유롭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시간 속에서 내일을 맞이합니다.
꿈도, 희망도, 비관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간이라는 것이 만들어내는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내일 속의 우리는 더욱더 나은 환경과 나은 모습이 되고자 합니다.
어떠한 환경? 어떠한 모습?
바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이상, 그리고 그 이상이 현실이 된 환경과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단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곧 희망이고 꿈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비관자들이죠. 흔히 이야기해서 비관론자라고 분류할 수 조차 없는 맹목적인 비관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하다는 것 자체는 스스로에게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꿈 그리고 내일과 바로 1시간 후에 대한 계획등에 대해 비관적인 의견을 맹목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명맥하던 심증적이던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거와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와 사실을 절대적으로 맹신한다는 착각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그러한 맹신하는 것 자체를 스스로가 극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다보니, 열심히 증거와 사실을 나열하는데만 촛점을 맞추게 되고, 그러한 증거 나열과 사실은 곧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더욱더 어려운 과정을 스스로가 회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회피과정만으로 충분히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진정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회피과정을 통해 비관적인 사고와 느낌을 쏟아내는 사람은 누군가를 설득시킬 힘도, 의지도 없는 것과 더불어서 스스로를 설득시킬 힘도, 의지도 상실하게 됩니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그 비관과 비난 자체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새로운 "대안"으로써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단순하게 비관과 비난을 내 뿜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안"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관과 비난적 사고가 어릴적 부터 고착화가 되어있던, 어떠한 계기가 있어서 고착화 되었던, 고착화된 일종의 "비관적 사고 기전(Mechanism)"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은 쏟아낼 수 있어도, 그 대안적인 발전적 미래는 쏟아내기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한번 다 내려 놓고 생각을 해보죠.
비관과 비난... 그렇다면 뭘 어쩌라고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맹목적으로 휩쌓이는 비관과 비난 속에서 결국 스스로가 극도의 불안감과 불안적인 현실감에 타인들의 사고와 생각, 내일을 모두 파괴하고 그냥 그 뿐인것입니다.
어떠한 작은 증거와 사실은 우리가 "확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익히 알았듯이,
그냥 "개연성이 존재하는 하나의 고리"일 뿐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관심"이라는 안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 이라는 안테나가 받아들이는 수많은 신호 중 특히, 비관적 사고의 증거와 사실들에 더욱더 촛점을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비관적 사고의 증거와 사실에 맞게, 비관적 의견, 비관적 판단, 맹신 등... 수많은 것들을 더욱더 고착화 시키고 더욱더 확대 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비관론자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관론과 대조되는 비관론은 무조건 멸시해도 무조건 맹신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비관론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증거와 사실을 나열하는데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파괴론자와 비관론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안의 제시 여부입니다.
대안을 내기 위해서는 대안의 기조가 형성되어야 하고, 대안의 기조로써 결론을 희망이라는 결과로 이끈다면 분명 파괴론자와 비관론자는 구별이 될 수 있습니다.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는 상호보완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낙관론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비관론자가 존재해야 낙관적인 미래, 희망적인 미래, 밝은 미래를 더욱더 안정적으로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고, 비관론자 곁에 낙관론자를 가장 가까이 둔다면 그 비관론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파괴론자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파괴론자는 결국 현실속에서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 누구나 함께 하는 인생속에서 파괴만 남는 결과를 결국 받아들일 사람은 누가 있고, 스스로도 매일 매일 내일을 맞아하는 가운데 과연 진정한 파괴를 즐기는 파괴론자라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과 극도의 시기와 질투가 만들어내는 파괴론적인 사고방식은 결국 낙관론자이던 비관론자이던 모두에게서 배척되고 결국 스스로 외로운 결과를 맞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파괴론자들은 그저 어떠한 일이나, 어떠한 사건, 어떠한 움직임이나 행동, 의도를 저지하였다는 것과 함께 자신의 숨은 의도를 가지고 앞서 이야기한 저지에 대한 성공을 희열로 그리고 숨은 의도에 대한 실천으로 기쁨을 맞이하곤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괴론자들은 남을 잘 믿지도, 남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 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기에 정황파악에 극도로 약한 것이 파괴론자들의 특성입니다.
과연 여러분들 곁에는 혹은 여러분 스스로가 파괴론적인 사고 방식으로 함부로 비관론을 제시한다고 행세하지는 않나요? 누군가를 막기에는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미래보다는 행복한 미래가 결론적으로 그 상대방에게 더욱더 이로울 수도 있습니다.
Positive Brings Positive, Negative Brings Negative.
낙관론도 비관론도 모두 공존하는 현실속에서 결론은 바로 "긍정" 그리고 "희망", "행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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